22/05/2026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정답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에 한 표 던진다. 당장 지금 이순간 나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오직 자신의 판단에 맡겨야한다. 다른 어떤 기준도 필요없다. 오직 지금은 지금일 뿐이고 이 순간은 오직 나의 선택과 책임만이 뒷따를 뿐다. 물론 책임이랄것도 없지만 말이다.
절반 쯤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주차하고 차안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간간히 싸이렌이 울리면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불빛을 비출 뿐 여기에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고 나만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한다. 지금 이순간 난 이세상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 스스로조차 다른 어떤 생각도 버리고 오로지 생각의 흐름을 따라 글을 쓸 뿐이다.
자유
특히 생각의 자유는 좀처럼 얻기 힘들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과 얽히고 얽힌 삶을 살아가야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있으면 어김없이 각각의 사람들의 생각과 말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결국에는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돈되고 서열화되어 평가되어진다. 물론 그건 최소한의 정석이다. 완전한 답은 절대 될 수 없다. 사회가 원하는 정답인 것이다.
반면 지금 이순간에 있어서 만큼의 정답은 오직 나하나 뿐이기에 나에게 의지한다.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인 것이다. 내 생각이 지금 현재 내가 원하는 방향인 것이다. 그래서 힐링이 된다.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실행한 일을 얼마나 자주 할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 병이 나고 탈이 난다고 본다. 특히 정신적인 부분의 문제의 대부분의 여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개개인의 충동의 흐름이 어느 순간 꽉 막혀버려 출구를 찾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혹여 지금 그러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잘 새겨들어야 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대화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야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하되 특정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도 안된다.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비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과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거듭나야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왔던 생각의 꽉막힘을 서서히 뚫어야한다. 풀어야한다. 어제의 풀리지 않던 문제점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받아들여졌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때론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자신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한다. 비우고 비우자. 그리고 세상만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자. 아무리 작은 그릇도 항상 비우면 언제든지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
그러니 신세한탄은 그만하자. 그 시간에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통해 막혀있던 출구에 새로운 출구를 선사하자. 자신에게 솔직하자.
22/05/2026
어쩌다 주어진 시간 56분
최근 틀에 박힌 생활패턴으로 쉴틈이 없다. 물론 좋은 방향이다. 이런 와중에 마지못한 휴식시간이 생겨버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시간에 주차타워에 차를 주차시킨 후 무작정 자판을 펼쳤다.
어떤 주제도 없다. 그냥 쓴다. 오롯이 이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나와의 대화시간이다.
오늘은 이 주제를 말해보고자 한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고 막상 없으면 아쉬운 상황에 대한 얘기다.
간혹 매스컴을 통해 로또 당첨된 사람이 와이프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사연이라든지 땅값이 갑자기 올라 부자가 된 사람들의 감당못하는 부로 인해 나락가는 인생이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온전한 나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대상(물질)의 위치가 변함에 따른 수동적 신분상승의 병폐인 것이다. 차라리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부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는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고 있다.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그렇고 이와 비슷하게 헐리웃 스타들의 허름한 옷차림의 뒤에 묻어나는 따뜻한 선행과 기부가 그렇다.
이데올로기 시기때는 항상 전자에 해당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왔다. 일본 앞잡이가 되어 완장을 차고 오히려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자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줬던 사람들, 조직 내에서도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사람대하는 방식에도 좋지않은 변화가 생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똑같이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경우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약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 자각이 없는 사람들인 경우다. 십중팔구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쉽다. 왜냐면 타인을 깔아뭉개야 자신이 이득을 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할까?
평범한 삶이 아닌 깨어있는 삶, 자각하는 삶, 주체적인 삶, 배려하는 삶을 당연히 선택해야 한다.
지금 혹시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자.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면 부하들에게 더 고개숙여야한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 위치에 올랐는지는 몰라도 항상 초심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언젠가는 인생에서 자신이 역으로 부하직원들의 위치에 다시 되돌아간다는 순리를 알아야 한다. 그게 인생이다.
약자가 되어 본 사람은 약자의 심정을 잘 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혹여 지금의 자신이 무결점의 완벽한 존재라고 인식되더라도 그건 아주 잘못된 착각이고 환상이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는 수동적 삶보다는 능동적, 주체적 삶을 살아가야한다. 환경의 변화는 옵션이다. 휘둘려서는 안된다.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가 되고 오늘의 약자가 내일의 강자가 되는 건 당연하다.
모 연예인이 잘나가는 시절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이후 자신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 경우도 그렇고, 어린 시절 왕따를 당했으나 성인이 된 후 크게 성공해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성공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조금 잘나간다고 지위가 높다고 재산이 많다고 나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한다면 분명 그 대가는 반드시 자신에게 올 것이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20/05/2026
AI세상이 오고 있다
로봇과 함께 근무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로봇이 집안일을 하고, 로봇과 함께 산책하고, 로봇과 함께 술마시고, 로봇과 함께 운동하는 시대가 온다. 당장 2026년부터 현장에는 시작되었다. 긴장해야하는 이유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그러한 급변하는 상황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그 중요성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잔뜩 긴장하고 실아가자.
키오스크가 매장을 점령한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은 키오스크가 없으면 주문이 안될 정도다. 장악한다는 말이 어울린다.
직장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 더 이상 중산층은 없고 초상류층과 극빈곤층으로 나뉘게 된다는 미래학자의 말이 정말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딱히 어떤 준비를 해야할지에 대해서 모른다. 나만 그런것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닥쳐올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있지만 막연한 불안뿐이다. 구체적인 준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기껏해서 코딩을 공부했고, 어설프게 드론, 3D프린트 등 남들이 준비하는 것에 발맞추어 준비했지만 이것 마저도 빗나간 목표물이 되고 있다. AI가 못하는 영역이 없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역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자부했던 분야에서 보란듯이 로봇으로 대체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동산 몰락이 현실이 된 지금, AI에 의한 중산층의 몰락도 불을 보듯 뻔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AI를 버릴 것인지, 아니면 AI와 정면승부를 펼칠 것인지. 이것이 문제로다.
19/05/2026
분노조절장애
분노를 잘 표출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때 다른 사람들보다 마찰이 많거나 싸우는 경우가 많은 경우라면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볼 수 있다.
물론 전후사정을 들어보면 화낼만하다. 그런데 그건 평범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임계치가 낮다고도 볼 수 있다. 분노를 억제하는 수치가 낮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별것 아닌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다. 이유를 살펴보면, 최근의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욕구충족에 문제가 생겨 전이된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 마치 어린시절 개에게 물린 사람이 성인이 된 다음에 개만 보면 불안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춘기 아이들 또한 분노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비슷하지만 좀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접근해본다면 이는 볼트가 너트구명에 잘 맞지 않아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현상인 것이다. 이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신분석 상담에서 분석가가 계속해서 말을 하고는 있지만 내담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에서 본다면 분석가가 계속해서 딴 말만 하고 정작 내담자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인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분노조절장애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이다. 물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분노조절장애를 충동조절장애로 보는 것이 정신분석적 관점이다. 충동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충동은 무의식의 영역이며 언어로 구조화된 형태를 가진다. 따라서 분노조절장애는 언어적 풍요로움을 통해 해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적 풍요로움은 쉽게 말해 대화로 볼 수 있다. 부부간의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 또한 대화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막혀있는 구조를 언어를 통해 흐르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동은 한쪽이 막히면 어김없이 다른 곳으로 유동적인 흐름을 통해 만족을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혀진 흐름을 언어적 풍요로움, 즉,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노력이 중요한 이유다. 자식이 분노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면 부모가 대화를 유도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와이프가 그러하다면 남편의 대화시도가 중요한 이유다.
간혹 매스컴에서 나오는 언어치료를 통한 부부간의 갈등해소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정노력도 필요하다. 자신의 증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더불어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중요하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하고 규칙과 법의 기준이 아닌 오직 자신의 주체적, 주관적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다. 맞지만 안 맞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법적 소송을 한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법의 무모함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법은 최소한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삶의 기준은 오직 자신, 즉, 주체적 개인이 되어야 하겠다. 분노조절장애의 해결책 또한 자신을 다스리는 정도에 따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16/05/2026
세상풍파
나만 그런가?라는 푸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인가?싶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유독 자신에게만 불행이 오는 것처럼 말하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 사는 게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말 잘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풀렸는데 성인이 되면서 부터는 맘 같지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느낄 것이다.
사소한 부분에서 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가령 횡단보도에서 차량과 접촉사고가 나고 난 후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는 착각, 허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아픔이 오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
암에 걸려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감기도, 길가다 넘어져도, 하는 사업이 잘 안되어도, 직장생활이 원만하지 않아도, 먹기만 하면 살이쪄도, 다른 사람들보다 못생겨도, 키작아도, 뚱뚱해도 등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풍파
어쩌면 풍파가 아닌데도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풍파가 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되려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초긍정적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심리에는 어떤 요소가 작용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추측컨대. 그보다 더 극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아닐까 한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때 무거운 무게를 들다보면 이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처음에는 무겁게 느껴졌던 무게가 어느 순간 마치 종잇장 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물론 그 무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무게임에는 틀림없다.
무게가 변한 건 아니다. 단지 그걸 받아들이는 내가 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풍파를 많이 겪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서 한 단계 성장한 사람에게 그러한 장벽은 더이상 장벽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상풍파는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서 180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만약 나에게 닥치는 어려움이 세상에서 제알 힘겨운 일이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보다 덜 힘겨운 일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순리대로 살자. 받아들이자. 지금의 힘듦과 풍파는 나를 더 단단하게 하는 과정인 것이다. 초긍정적 마인드로 무장하자. 그게 세상 잘 사는 진리다.
13/05/2026
패배자 마인드
살다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패배자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환경이 반복적으로 실패와 패배의 늪에 빠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 폐쇄적 마인드가 굳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한 예로 그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끝나면 으례 자신은 돈이 없어 계산을 못한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두번이 아니라 매번 그런 말을 내뱉는다. 다른 예도 이와 비슷하다. 말은 없지만 자신은 쏙 빼고 책임을 부담하라는 뉘앙스다. 과거부터 그러한 행태가 반복된 탓이다. 아마 자신은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될 것이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이 대해왔으니까 말이다. 이는 상황이 바뀌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직 자신만 열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마인드는 수정될 수 없는가이다.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무척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그들의 마인드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기유발이 필요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아마도 평생 그렇게 살아가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타깝다.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기 쉽다. 특히 어린시절이나 힘없는 시기에 더더욱 타인에게 의지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말한다. 처음부터 그러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만약 노출되었다면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정면승부를 통해 극복해야만 한다. 수동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면 결과는 어쩔 수 없다. 그게 인간 삶의 섭리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당연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가족이 될 수 있고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주위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유심히 보자. 그리고 그들을 무작정 돕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심어주자. 단순한 한마디면 된다.
친한친구가 그러하다면 그냥 "친구 난 넌 믿는다"라는 말이면 될 것이고, 가족이라면 "네 주위에는 항상 가족이 있다"라고 말하면 된다.
성인이 된 후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 또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결과에 대한 잘못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05/05/2026
누가 누가 더 현명한 인생을 살까?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과 가진 것 없이 홀로 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둘 중 어느쪽이 더 멋진 인생을 산다고 보는가?
물론 여기에는 각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줄 안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사는 방식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지금부터 나오는 내용은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나온 견해이기에 참고만 하길 바란다.
대통령의 권위는 자국민의 생계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 심지어 전쟁상황에서의 결단은 수많은 생명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을 정도다. 그러한 권력과 위용을 가진 삶도 나름 의미있는 삶이겠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삶에서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의 매력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의 의미 차원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낙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이데올로기를 좇아서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그 시대에 맞아야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도 비슷하다. 또한 미의 기준이 시대에 다라 다르다는 것도 맥을 같이 한다.
정해진 목적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좇는 삶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도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또한 타인들에 의해 인정받고 멸시받고 하는 것에 대한 부분도 중요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들의 관점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삶인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삶의 주인이 누군가이다. 모두는 말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나의 부모가 그랬고 나의 먼 조상들이 다 그렇게 살았다고 스스로 안주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삶이 의미있는 삶일까? 어린시절 양육자들에게 되물림 된 세상사는 방식과 행동양식 등이 마치 정답인양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새로운 인생에 대한 로망도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사회에서 금지시한 것들에 대한 의문을 가질 필요도 있다. 그것은 기존 사회가 사회권력 유지를 위해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시도다. 남들이 다 좋다고 나에게도 좋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직 스스로의 만족과 안정, 그리고 죽는 시점에 참 알차게 살다 죽는다는 그러한 느낌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의 소용돌이에 묻혀 진정한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겉으로 번지르한 환상에 속아 오인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깨어나야 한다. 어떤 조직에 있다면 그 조직의 틀을 깨부셔야한다.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면 그러한 권력을 버리고 자신이 아는 순수한 자신으로 스스로를 바라봐야 한다.
가진 게 없어도 된다. 지위가 낮아도 상관없다. 그 틀 안에서 허우적 거리기 보다는 틀을 깨고 틀 밖에서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매 순간이 새로움과 창조여야 한다. 사회 속 내가 아닌 내 안의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사회의 틀 밖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한 반복적 태어남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한다.
오늘은 이런 영상을 보았다. 나이 70살 넘은 여자가 20대들이 입는 흰색 원피스를 야하게 입은 모습을 주위사람들이 쳐다보는 영상이었다. 시선이 탐탁하진 않았다.쭈글쭈글한 피부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은 추할 분이었다. 보기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건 알아야한다. 그 옷을 입은 70대 노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인생의 기준이 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그녀 자신은 타인의 시선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남자는 치마를 입으면 안되고 여자는 싸움을 잘하면 안되고 근육이 있으면 안된다는 건 사회가 만든 원칙일 뿐이다. 그러한 원칙은 사회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당신은 대통령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사회법을 어기고 산 속에서 가난한 노숙자로 살고싶은가? 과연 거기에 대한 정답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
26/04/2026
세상사는 세가지 유형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한 유형 분류는 조금은 생소할 수도 있다. 보통은 두 가지 부류로 유형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첫째 유형은 안하무인 격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유형이다. 아파트 경비원의 수정주차 요청에 학을 뛰면서 욕을 하고 큰소리로 윽박지르는 여성이 될 수 있고, 고속버스 좌석을 뒤로 완전히 젖힌 부분을 수정하라는 운전기사의 요구에 비상식적으로 불응하는 여성, 그리고 지하철에서 노인의 이마를 핸드폰으로 가격해서 피가나게 만든 여성들이다. 예를 들다보니 전부 여성인 부분은 개별적인 예시기에 오해없길 바란다.
둘째 유형은 사회규범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유유자적하듯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좋은 아빠, 현모양처, 듬직한 남편, 인정받는 부장님, 직장에서 총망받는 신입사원, 공부잘하는 학생, 본받을 만한 스승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최고선을 추구하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완전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행복의 상징으로 내비치는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유형은 조금은 다른 유형이다. 필자가 강조하는 유형이고 현실을 벗어난 유형으로 봐도 좋겠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실재라는 것을 말하면서 현실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내가 모르는 가장 나다운 내가 존재하는 곳을 말했다. 즉, 상징계가 지배하는 현실의 공간을 벗어난 실재를 향한 삶의 방향성이라고 보면 좋겠다.
사회조직 내에서의 인정과 욕구충족을 넘어선 오직 개인의 근원적 충동의 만족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세계에서의 사건들은 환상일 뿐이다. 그런 환상을 좇는 삶보다는 한 사람의 순수욕망인 충동을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재화라든지 선의 추구, 도덕적인 삶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오직 자신의 인생에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거기에는 어떤 이데아와 같은 완전한 존재는 없다. 오직 텅빈 공백의 상태로 되돌아가 억압없는 만족을 승화를 통해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별일 아닌 것들이 되며 초월적 존재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신화에서 안티고네의 삶이 그랬고, 성철스님의 삶이 그랬으며,니체가 말한 초인(위버멘시)이 그런 존재다. 비우는 삶,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는 오직 한 개인만이 가진 그 독특한 개별성을 향한 욕망인 것이다. 그 어떤 사회적 지위도, 재화도, 도덕적 기준도 없다.
'나는 나이다"의 문장처럼 존재 자체에 대한 텅빔을 향한 욕망인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은 어쩌면 현실세계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유형이고 우리들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두번째 유형처럼 세상을 살아가야한다고 배웠다. 물론 첫번째 유형은 그야말로 인간쓰레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첫번째 유형들 중에도 마지막 유형과 흐름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디즘의 어원이 된 사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적 욕망의 끝을 향해 돌진한 사회악이었지만, 최소한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체가 피학자가 되고 타자가 물신이 되는 오류를 범하면서 승화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녔다. 비슷하게 궁정풍사랑의 기사도 정신 또한 결혼한 여성을 비인간적 파트너로 만들면서 자아도취적 대상으로 오인하는 오류로 인해 승화와는 구별되었다.
따라서 마지막 세번째로 말한 유형과 같은 삶은 존재 그 자체의 텅빔, "나는 나이다"로 대표되는 공백을 향한 삶인 것이다. 인간의 상징적 현실사회에서 발생된 사회적 지위, 재물, 도덕 등은 환상일 뿐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피카소의 그림과 초등학생의 그림이 비슷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데아와 같은 세상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은 횡설수설하는 흐름이지만 이 글에서는 핵심 요점만 잘 파악했으면 좋겠다.)
24/04/2026
이것을 알고 있었는가? 당신은...
도덕적 선, 공공의 선, 사회적 선을 어기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다. 즉, 악인이다. 공감하는가?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당연시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이러한 순응이 지배권력에 순응하는 흐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로 인해 개개인의 순수욕망은 숨겨야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이 부분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받고 있는가? 묻고 싶다.
당장 필자는 정치색은 전혀 없다. 하지만 급진적인 현상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들에 대한 지배권력의 폭력성이 정당화되어 행사되어지는 현실에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모색의 필연성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정신분석은 이러한 이유로 혹자들에 의해 종교화가 시도되기도 했으며, 정치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무리들에 의해 휩쓸리기도 했다.
어떤 의도를 떠나서 순수하게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인간 개개인의 순수욕망은 사회가 억압하고 악으로 규정시켜버린 건 당연시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떠한 토도 달지 않았고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했으며 악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지배권력 유지를 위해 개개인의 순수욕망이 억압받는 부분은 오류가 있다고 보이진 않는가? 이로 인해 어떤 인간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면 또 어떤가? 이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나 없으면 안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에 자신의 욕망은 내면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둔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는 않았는가? 그렇다고 미래에 행복이 찾아왔는가?
지금까지의 문장들에서 의도된 대로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아주 비사회성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단정지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욕망의 만족은 그 자체로 인간의 순수함이다. 사회의 지배권력이 이것을 규제하고 억압해서 사회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태신앙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개개인의 순수욕망을 쫒아가야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단지 깨어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8/04/2026
열린마인드
마인드가 열려야한다.
즉, 담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비워진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열린마인드를 가진다는 건, 나와 다른 의견도 받아들인 후 취사선택해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의 단계가 완벽해 보이고 강해보일지 모르지만 그 단계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니체는 보았다. 현실 세계를 규칙과 상징체계 안에서 이해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이든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사자의 단계와 비슷하다고 본다. 철벽수비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행태를 보고 있자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본의 아니게 그런 상태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거의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런 상태다.
이유는 뭘까? 수동적인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누군데"라는 식의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에 현실에 있는 자신의 초라함은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여기는 탓도 있다. 지나간 과거는 항상 과장되어 기억속에 저장되는 것도 한몫한다. 첫사랑이 그토록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 또한 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노인이 되는 바른 자세는 뭘까?
단순하다. 앞서 제목에서 말한 열린마인드를 가져야한다는 걸 항상 인지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다.
다양한 인생을 서적을 통해서도 접해보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걸 즐기고, 하나의 사건을 항상 같은 시각이 아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안좋은 케이스는 평생을 한 직장에서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테두리가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일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좀처럼 열린 마인드를 가지기 쉽지 않다. 그래도 노력해야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가 되어야하고, 권력자들 사이에서 권력자 아닌 시민이 되어야하는 이유다.
한사람의 인생으로 봤을 때 열린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질이 훨씬 더 높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큰 사건을 겪고 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유연해지는 이유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보다 큰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18/04/2026
모든 흐름은 일맥상통한다
"일맥"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핵심적인 기준으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쉽게 설명하면 운동을 잘하는 선수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가 될 수도 있고, 어느 시점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루틴이 될 수도 있겠다. 즉, 잘 되는 놈은 항상 잘 되는 식의 논리다.
과거 운동선수 출신이기에 공부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본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어린시절 운동선수들의 교육관행이 그다지 좋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크게 작용한 듯 싶다.
대학시절 다니던 체육학과가 자연과학대에 속해 있어 타과 학생들과 체육대회를 할때 이런 말도 들었던 적이 있다. "무식한 체육학과를 어떻게 이겨?"
그 문장 속에는 "무식한"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운동 잘하는 체육인을 치켜세우기보다는 비꼬는 말투에서 타인들의 선입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본인은 어린시절부터 운동을 해왔었기에 공부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다. 자존심이 강했던 탓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공부와 운동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공통점을 찾자면 수도 없이 많다. 혼자서 묵묵히 할 수 있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다. 중학생 시절 전교에서 상위권이던 성적이 육상을 다시 시작하면서 반에서도 중위권으로 밀려나는 식의 시행착오였다.
그래서일까 그러한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는 앞서말한 각각의 분야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공통점이 향후 다른 분야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성공과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한번 성공한 사람은 두번 성공할 확률이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